본문 바로가기

여행정보/국내

그대, 언제 이 숲에 오시렵니까? -곰배령 공정여행기

아침 8시. 강변역 테크노마트 앞에서 ‘곰배령’ 참가자들을 만나기로 했다. 살구와 나는 7시 40분 정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승합차 안에는 많은 분들이 미리 타있었다. 한 분 빼고는 다들 8시보다 일찍 오시거나, 혹은 정시에 승차하셔서 살구가 짤막하게 인사를 한 후 출발할 수 있었다. 가는 길에 곰배령에서 야생화에 대해 설명해주실 현지 가이드 홍순경 선생님을 태우곤 강원도로 2시간 반 가량 달렸다.

전날 밤을 새고 온 터라 나는 차가 달리기 시작할 때부터 금방 잠에 빠져들었다. 세상모르고 자던 나를 깨운 건 구불구불한 강원도의 산간 도로였다. 정신없이 휘어지는 승합차 때문에 눈을 떠보자, 서울의 회색빛 건물과 공기는 어디로 가고 온통 녹색 나무들이 보였다. 회색이라곤 아스팔트 길 밖에 없었다. 하늘도 푸르렀다. 밀려오는 잠을 뿌리치곤 녹색 가득한 바깥을 오래도록 내다보았다.

중간에 점심으로 두부구이와 찌개를 넉넉히 먹고 우리가 묵을 ‘꽃님이네민박’에 도착했다. 방이 깨끗하고 넓은데다, 방마다 예쁜 야생화 이름들이 붙어있어서 좋았다.

짐을 풀고 곧바로 ‘뒷산걷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려 홍순경 선생님과 함께 단목령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중간에 산림청 사람들에게서 제재가 들어와 걷지 못했다. 언제나 주민들과 함께 걷는 것은 양해가 됐었는데 이번엔 산림청에서 벌금 스티커까지 발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는다. 하는 수 없이 점봉산 산책로 코스로 발걸음을 돌려야했다. 단목령은 곰배령보다 사람들의 발길이 적어 더 옛 길 같은 느낌이 나서 참 좋다고 했었는데, 아쉬웠다.

점봉산에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려 저마다 우비를 꼭꼭 입고 승합차에서 내렸다. 높은 곳이라 그런 지 안개가 매우 짙었다. 실제로 여행 참가자들이 점봉산 산책로 코스로 가는 다리를 건널 때, 나는 20m 앞도 보이지 않는 안개에 조금 겁을 먹었다. 마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처럼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터널 같았던 것이다. 나는 맨 후미 쪽을 맡아서 여행자들을 인솔하고 있었는데, 이런 곳에서는 자칫하면 크게 사고 나겠구나 싶어 마음을 단단히 다졌었다.

다행히도 산책로에는 끊이지 않고 난간이 있었고 나는 처음보다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게다가 처음 점봉산 코스에 발을 내딛었을 때, 흙이 굉장히 포근해서 나를 반겨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안개에 젖은 풀냄새 덕에 코끝도 향기로웠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산책로는 어딘지 모르게 나를 날카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앞서 가는 여행자들의 색색깔의 우비에 집중하며 걷던 와중, 왠지 등 쪽이 서늘했다.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뭐지?’하고 시선을 아래로 내리려는 찰나, 난간 너머 한참 아래로 밑동만이 남았거나 뿌리를 위로 한 채 쓰러져 있는 나무들이 잔뜩 보였다. 순간적으로 오싹하는 느낌과 함께 나는 그 곳에서 눈길을 뗄 수 없었다. ‘나무들의 시체’라는 단어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정말 이상하게도, 그 때 한 줄기 끊어질듯하게 가녀린 바람소리도 들었다. 귀신을 믿진 않지만, 분명 그 바람은 나무의 혼령이 담겨있을 거라고 생각될 정도로 서늘하고 오싹했고, 슬펐다.

나중에 홍순경 선생님께 들어보니 정부가 점봉산에 댐을 만들 때 잘라버렸던 나무들이라고 했다. 멀리서 봐도 굵기가 제법 되어, 꽤 오래된 나무들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그렇게 강력하게 한을 뿜어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선생님이 드문드문 야생화나 나무에 대해서 설명하시고 있을 때도 내 마음은 아까 보았던 ‘시체’들 때문에 무거웠다.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광경을 사진으로 남겨두려 카메라로 몇 장을 찍었지만 안개 때문에 사진도 잘 나오지 않았다. 야속하게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댐 안에 가두어둔 물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고 카메라에 잘 담기기만 했다.

중간에 잠깐 쉬면서 홍선생님께서 가져오신 옥수수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어마셨다. 그것을 시작으로 사람들은 저마다 가져온 과자, 개떡 등등의 씹을거리를 꺼내어 오순도순 나누어 먹었다. 자칫 사람을 침울하게 만들 수 있는 안개가, 그 순간에는 사람들 주변을 은은하게 감싸며 포근하게 보였다. 풍경이 참 좋았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화기애애했던 분위기에 무거웠던 내 마음도 한층 가벼워졌다. 특히나 홍선생님의 야생식물 설명에 눈을 반짝거리시던 참가자들의 표정을 보는 것이 너무 즐거웠다. 사진이 아니라 영상으로 찍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정말 수없이 생각했다.

코스가 끝나고 산을 내려올 땐 승합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내려왔다. 가는 길에 방울꽃도 만나고, 안개모자를 쓰고 있는 산할아버지도 만났다.

꽃님이네서 맛난 산채비빔밥을 먹고 저녁엔 ‘곰배령 4계절’ 이야기를 들었다. 빔 프로젝트와 컴퓨터를 연결해서 곰배령의 4계절들을 야생화와 풍경사진 슬라이드 쇼로 보여주며 설명하는 식의 프로그램이었다. 곰배령 여행 중에서 가장 첨단의 기술을 사용한 시간이었다.

약 2시간 동안 얼레지, 현호색, 노루귀, 바람꽃, 복수초, 한계령 등등의 많은 야생화 사진과 이름을 접했다.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짐을 챙기고, 전 날 아궁이 위에 올려놓은 덕에 따뜻해진 운동화를 신었다. 아침을 먹고 곰배령으로 출발하려는데, 꽃님이네 개들이 그새 정이 들었는지 졸졸 따라온다. 아쉬운 마음에 몇 번 쓱쓱 쓰다듬어주고 길을 떠났다.

곰배령 입구에서 ‘숲사랑’이라고 적힌 노란색 조끼를 받아 입고 걷기 시작했다. 곰배령을 오르는 길은 경사가 거의 없는, 넓은 산책로 같은 느낌이었다. 오르는 내내 촉촉하고 보드라운 흙길과 맑은 계곡이 보여서, 도시에서 답답했던 숨이 탁 트였다. 주변엔 온통 고른 숨을 내뿜는 나무들이었고, 고개를 조금만 돌리면 삶에 지쳐 열이 오른 마음을 식혀줄 계곡이 있었다.

목이 마를 땐 그 계곡물을 손에 한 줌 담아 마셨다. 불현듯 가장 깨끗한 물에서만 산다는 쉬리가 떠올랐다. 계곡을 휘휘 둘러보았지만 물고기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들이 나타나서 바위 밑으로 숨었나?

홍선생님의 야생화 설명을 들으며 올라가는 길은 무척 즐거웠다. 어제보다 열렬한 여행자들의 반응이 너무 좋았다. 소녀 같은 탄성과 연신 끄덕거리는 고개가 리듬감 있게 다가왔다. 전 날 저녁 설명을 들었던 야생식물들이 나타나면 “앗 ○○다!” 하며 금세 눈을 반짝거렸다. 내 눈엔 곰배령의 풍경보다 그런 여행자들의 표정들이 더 아름다워 보였다.

드디어 곰배령 정상이다. 안개가 자욱하게 껴 예상했던 것보다는 곰배령의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지만, 여행자들의 웃음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꽃 속에 들어가거나 곰배령의 장승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할 수 있는 만큼 곰배령의 정상을 즐기는 모습들이 참 좋았다. 사진을 다 찍은 후엔 홍선생님이 가져오신 한계령 막걸리를 나누어 마셨다. 다른 분들은 다 맛있다고 하셨는데 어쩐지 내 입에서만 미용실 맛이 나는 것 같아 나는 많이 먹지 못했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할 단체사진. 안개 속에서 곰배령을 걷느라 초췌해진 모습을 샤샥 다듬는 여행자들의 모습은, 마지막까지 나에게 웃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