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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국내

지리산 숲길로 마실 떠난 1박2일 공정여행


지리산 둘레 길을 다녀왔다.
수철마을에서 세동마을까지 이어지는 이 코스는 마치 동네 뒷산처럼
완만하고, 편안해서
숲 길 따라 마실 떠난 기분이었다.
점점 햇살이 기승을 부리는 유월의 마지막 주였지만 비가 와준 덕분에 덥지 않게 걸을 수 있었다.
덤으로 안개에 쌓인 숲길은 어찌나 운치가 좋던지.

비바람이 살랑 불 때면 나뭇잎들이 서로 부딪히며 시원한 소리를 내었다.
닫혀있던 나의 귀에 세상의 좋은 말들을 속삭여주었다.



동화책 어느 귀퉁이에 숨어있을 법한 숲길.
안개 때문에 저 멀리 도착지가 보이지 않아
발걸음이 더 느려졌다.
한층 더 여유로워졌다.
천천히 걸음을 놓고 있자니 이 생각, 저 생각들이 내 발자국을 쫒아 나를 따라왔다.
그리고 포근한 안개가 그 생각들을 비밀에 부쳐주었다.



숲길을 걷고 나서 마주하게 된 상사폭포.
한 총각이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상사병에 걸린 총각은 계곡이 되고 여인은 폭포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사랑은 총각 혼자 했는데 왜 애꿎은 여인까지 폭포가 되어버렸는지 행방이 묘연하지만
어쨌든, 낭만적인 기분으로 계곡에서 발장난을 치기엔 너무 미끄러워
허둥지둥 물만 묻히고 그 곳을 떠났다.


방곡마을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오솔길.
중간에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던 산딸기들이 새침했고 양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개망초가
청초한 분위기를 내었다.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찬찬이 걷다보니 어느새 방곡마을에 도착하였다.
오늘 나에게 따듯한 밥과 잠자리를 내어줄 작은 마을, 방곡.
오늘은 이 마을의 회관에서 밥을 먹고 마을 어르신들과 영화를 함께 볼 예정이다.
우리가 도착하기도 전에 마을회관에선
마을 어르신 한 분이 저녁거리를 준비하고 계셨다.
"도와 드릴까요"라고 한 마디 하기가 무섭게
"주방에 사람 많으면 정신없어요, 쉬시요"
라고 말씀하시는 어르신.
퉁명스런 말투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냥 앉아서 기다린 보람이 있는 맛있는 저녁상.
된장국, 제육볶음, 묵무침 등등...
한마디로 집 밥보다 맛있었다..




“아, 아. 오늘 마을회관에서 영화 틀 거라니까 구경하러들 오세요”
마을에서 가장 젊으신(연세가 쉰이시지만 그래도 방곡마을에선 막내다)
이장님이 마을방송을 하셨다.
몇 분후, 어르신들이 회관 문을 열고 오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어르신들과 영화 보는 시간.
영화는 "웰컴투동막골"
6.25 전쟁에 관련된 거라 공감하시며 보시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먹고 하자"

인민군과 남한군이 감자 먹기 전에 신경전 하는 장면에선
"야야, 싸우지 말고 배고플텐데 어여 감자 먹어라" 라며
간혹 정말 실제로 일어나는 이야기인듯,
스크린에 대고 말을 거시는 모습에 모두들 박장대소 하기도. 



집중하시는 모습..그러나 이런 모습은 수박이 제공되자마자 깨지고 말았다..


다음 날 아침. 전 날에 어찌나 흥분을 했던지, 
아직도 월드컵 응원의 여파가 가시지 않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새벽같이 일어났다.
아침밥을 먹고 마을회관을 정리하고 세동마을을 향해 출발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둘레 길의 논밭들은, 아침이슬을 머금어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지리산에 놀러 온 오리(위)와 넓은 길에서 함께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는 둘레 길(아래)



도란 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둘레 길을 빙빙 돌다보면 어느새 마주하게 되는 세동마을.
높은 지대에서 전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층층이 고개를 내밀고 있는 집들의 흐트러진 모습들이 자연스럽다.



직접 손으로 만든 간판과 모양새가 이국적이었던 세동마을의 대구댁.


대구댁의 내부에는 벽부터 천장까지, 이곳을 지나쳤던 여행자들이
손으로 남긴 발자국이 가득하다.


그리고 푸짐하게 차려진 시골밥상...^^



1박2일 동안
무엇이든 감싸안아줄 것 같은 차분한 모습을 보여줬던 둘레 길.
덕분에 나 역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곳저곳 여유롭게 눈길을 돌리면서 걸을 수 있었다.
 그 숲 길엔 아직도 내가 숨겨놓은 생각들이
안개에 살포시 쌓여있을까.

만약, 숨겨왔던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싶다면, 이 숲 길로

"어서 걸으러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