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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정보/국내

로드락 제8호 - 우리 삼촌 얘기, 들어보실래요?

우리 삼촌 얘기, 들어보실래요?


네팔에 삼촌이 생겼어요. 이름은 미노드 목탄. 그냥 미누 삼촌 혹은 미누 마마(삼촌이란 뜻의 네팔어)라 불러요. 미누 삼촌ㅡ하고 부르면 왜ㅡ하고 따스하게 웃으며 돌아봐주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멋진지 몰라요. 아, 삼촌이 노래 부르는 모습이 더 멋있어요. 밴드 '스탑 크랙다운(Stop Crack Down)'의 보컬이거든요. 삼촌은 우리에게 어르빈이랑 람, 어딘 같은 우리 또래의 네팔 친구들도 소개시켜 줬구요, 동굴사원에도 같이 놀러갔어요. 삼촌에겐 12명의 조카가 한국에 생긴 셈이죠. 삼촌을 보려면 우리가 네팔로 가야 해요. 삼촌은 한국에 오지 못하시니까요. 왜냐구요? 삼촌은 작년에 한국에서 강제추방 당했거든요.


#1. 한국을 가다
아직 네팔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네팔에 대해 잘 몰라요. 근데 여러분은 만나고 싶고 그래서 이렇게 이 자리에 함께 하게 됐네요.

1992년 2월 22일에 한국에 갔어요. 작년 10월 24일에 네팔에 도착했구요. 17년 8개월 동안 한국에 있었어요. 처음 한국에 갔을 땐, 진짜 한국말 하나도 몰랐어요. 한국에 대해서 아는 것도 올림픽 하는 거 TV로 본 정도였죠. 남산타워 오픈할 때 한 불꽃놀이가 네팔 신문에 났었거든요. 그거보고 아버지가 야, 가보고 싶다, 했는데 우연찮게 가게 됐죠. 그땐 이주노동법도 없을 때라 관광비자 받아서 한국에 갔어요. 관광비자 받아서 갔으니 18년 내내 미등록 외국인이었구요. 제가 갔을 때가 한국에 노동력이 많이 필요할 때였고, 또 이주노동자에 관한 제도도 없고 하니까, 동남아에서 온 사람들 다 눈감아 줬어요.

이태원이 외국인들의 중심지거든요. 이태원으로 가면 사람들이 와요. 제가 갔을 땐 Mr.Kim이라는 사람이 왔어요. 그리고 식당일과 가방공장일 있다고 선택하라 하는 거죠. 대부분 사람들이 식당일을 꺼려해요. 그래서 저는 식당일 하겠다고 해서 의정부에 있는 식당으로 갔어요. 한정식집이었는데, 네팔엔 바다가 없잖아요. 그래서 비린내가 좀 힘들었어요. 누룽지가 날 살렸죠. 맨날 누룽지만 먹고……. 이젠 뭐, 아마 내가 여러분보다 한국음식 잘 먹을걸? (웃음) 그 식당에서 한국음식도 배우고 한국문화도 배우고 거의 다 거기서 배웠어요. 제가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한국가요도 많이 들었구요. 그 식당에 노래방 기계가 있었거든요. 오후 서너 시쯤에는 손님 없으니까 노래 부르고 그랬었죠.


#2. 한국에 적응하다
그렇게 2~3년이 지났어요. 제가 한국 사람들이랑 살아서 한국말을 빨리 배웠거든요. 그러니까 친구들이 막 나가서 노래해보래요. 그 'KBS 외국인 노래자랑' 이런 데 있잖아요. 그런데 나가서 대상도 받았어요.

식당일을 하면 쉴 수가 없어요. 주말에도 일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한국인 친구랑 놀려고 공장일을 시작했어요. 동대문에 있는 봉제공장에서 기술 배우고 친구랑 동업하기로 하고 작은 방 하나 얻어서 일했었죠.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에서 1년에 한 번 노래대회를 하는데 거기서 저랑 제가 아는 네팔 친구한테 네팔 노래를 불러달라는 거에요. 막 고민했죠. 근데 친구가 어차피 한국 사람들은 네팔 노래 못 알아듣고 하니까 차라리 우리가 한국 노래를 부르자! 하는 거에요.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도전했는데 너무 운 좋게도 대상을 받았어요. 그때 대상에게 주는 상품이 홍세화 선생님 아시죠. 홍세화 선생님과 함께 파리 여행하는 거였는데 저는 미등록 외국인이었으니까 아쉽게 파리는 못 갔죠. 대신 제주도 갔어요.

계속 공장일도 하고 노래도 하고…. 한국말 잘 못해도 같이 잘 지내주세요, 이런 노래 불렀던 것 같아요. 녹색지대 노래도 불렀어요.(웃음)


#3. 농성을 하다
그러다 2003년에 정부에서 4년 이상 산 외국인을 추방한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시민단체에서 '제도 개선이 우선이다' 하는 농성을 하니까 저도 거기에 갔죠. 난 시위 같은 거 잘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나만 잘 살면 되지, 하는 사람이었고. 10년 동안 그런 농성이 있는지도 몰랐고 내가 한국에 해달라는 것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가라니까 되게 묘한 느낌. '아, 난 이 사회 사람 아니구나…. 아웃사이더구나….' 그런 복잡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때 농성에서 11명이 죽었어요. 감시가 무서우니까 이주노동자들이 라면 같은 거 사재기해서 공장에서 살다가 음식이 다 떨어지면 목매서 죽고 그랬어요. 그때 스리랑카 사람이 전동차에 몸을 던져 죽었는데 그게 처음으로 매스컴을 탔죠. 처음이자 마지막. 나는 시청 옆 성당에서 농성했는데 방송국에서 와서 찍어도 방송에 안 나가요. 피디한테 전화하면 아, 뭐 밀렸다, 맨날 이런 말만 해요. 우리 시민들도 이런 모습을 알아야 한다 생각했는데 미디어에서 그런 걸 안하니까 나중엔 내가 직접 카메라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농성하면서 제가 밴드를 만들었어요. 그때 만든 노래는 주로 구호들이었죠. 네팔, 버마, 미얀마, 인도네시아 그리고 한국 친구들이 모여서 감시가 무서워 죽은 친구를 위해 만든 노래가 있어요. '친구여 잘 가시오' 라는. 어떤 좋은 분이 스튜디오를 하루 빌려주시고 시민단체 분들이 돈 조금씩 모아서 '친구여 잘 가시오'란 1집을 냈죠.

'스탑 크랙다운'은 강제추방중단 뭐 이런 뜻이에요. 2집은 전국 돌아다니면서 공연하고 받은 돈 모아 2006년에 냈는데 거기에 '월급날'이란 노래가 있어요. 이주노동자들의 겪는 가장 큰 문제가 월급 못 받는 건데 그거에 대해 만든 노래에요. 뮤직비디오도 전부 제가 찍고 편집했어요. 농성 대신 문화적으로 접근하는 방법을 찾아낸 거죠.


#4. 작업을 하다
2003년 농성한 후에 일하기 싫어진 거에요. 이 사회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래서 친구한테 말해서 공장 못하겠다고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친구도 그럼 안하겠대서 같이 정리했어요. 그리고 시민단체에서 6개월 정도 인턴생활 했어요. 단체 돌아가는 일도 관찰하고 단체에서 하는 사업, 예를 들면 초등학교에 가서 네팔의 문화에 대해 설명한다던지, 네팔어 번역을 맡는다던지, 문화 행사를 준비하는 일 같은 걸 했었어요.

제가 노래도 좋아했지만 노래보단 미디어를 더 좋아했어요. 편집하고 그런 거. 아트 TV에서 일하면서 사람들한테 이주노동자의 모습을 알리는 역할을 한 거 같아요. 아쉬운 게 있다면 아트 TV는 스카이 TV같은 곳에서만 나오는 채널이라 더 많은 사람들한테 열려있지 않았어요. 50년 후면 한국도 다문화사회가 될 텐데 미리 연습해둬야죠. 다양한 사람이 앞으로 한국인이 될 건데. 싫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거라는 거에요. 이주노동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게 아니라 사회 인식을 높여주는 거거든요. 사람이 나라를 넘나들면서 서로의 국가발전에 도움을 주는 거죠. 그런 부분에서 한국이 굉장히 높게 평가받고 있었어요. 지금은 정권이 바뀌면서 좀 달라지긴 했지만.


#5. 그리고, 다시 네팔
저는 강제추방을 피하고 싶지 않았어요. 한 번도 장기체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장기체류자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어요. 이런 사례가 없었거든요. 시민단체에서도 사례가 없어서 일을 못하고 있었는데 내가 시작하니까 시민단체들도 도움을 주고……. 추방이라는 게 당사자가 아니면 그 느낌을 몰라요. 한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에게 미등록자들에 대한 제도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한국을 원망하진 않아요. 한국 간 걸 후회하지도 않구요. 만들어진 테두리 안에서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이제 네팔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 해야죠. 인생은 도전이라고 생각해요. 도전정신만 있다면 헛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어요. 준비 없이 네팔에 왔지만 설마 죽기야 하겠어요? 친구들도 만나고 여러분도 만나고 하면서 조사 중이죠. 조금 문제가 되는 건 언어? 좀 서툴러요. 20년 전 말을 하는 거죠. 가족들은 나가서 말하지 말라 그래요.(웃음) 그거 빼면 지장 없어요. 사실 되게 영화 같은 느낌이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한국이 아닌 네팔, 내 방 벽이 딱 보이는데, 20년을 건너 뛴 그런 느낌.

남산 아래 후암동에서 살았거든요.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따뜻한 집에서 잔 적이 없어요. 그런데 그때가 왜 그렇게 행복했는지 모르겠어요.

깨달음을 얻은 거죠, 한국에서. 부처가 인도에서 해탈했듯이.

 

미누 삼촌을 처음 본 건 인터넷 뉴스에서였어요. 그땐 삼촌도 아니고 그냥 미누 씨였죠. 어딘이 미누 씨를 네팔 초대길별로 섭외했으니 미리 검색해보라 하셔서 어쩔 수 없이 찾아본 기사였어요. 그때만 해도 전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미누 삼촌을 네팔로 보내지 않으려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어쨌든 법을 어긴 사람인데 왜 그렇게 감싸주나,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데, 싶었거든요. 근데 미누 씨가 미누 삼촌이 되고 나서야 알았어요. 로드스꼴라 떠별들과 미누 씨가 조카와 삼촌이 되는데, 우리와 삼촌의 국적이 다르다는 건 그다지 상관이 없었어요. 중요한 건 마음이었죠.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한국에 대한 진득한 애정이 느껴지는 삼촌을 언제쯤 다시 한국에서 만날 수 있을지 궁금해지네요. 그런 날이 오기는 오겠죠?



2010. 6 월간 로드락 제8호
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