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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블러스맵 소식/언론 보도

[비건/7월호]오롯이 나의 영혼을 마주하는 길 - 카미노 데 산티아고

# 이 글은 채식전문매거진 비건 2015 7월호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스페인 순례길 여행 카미노 데 산티아고

오롯이 나의 영혼을 마주하는 길


+ 글 트래블러스맵

+ 사진 트래블러스맵 외

+ 에디터 박예슬




광고 속 카피 한 줄과 동네 형의 한 마디




Q. 두 분은 어떻게 거기에 가게 된 거에요?


호시: 저는 두 번을 갔어요. 처음에는 엄마랑, 두 번째는 혼자. 처음엔 회사를 이직하려고 할 때였는데, 퇴사를 하면 엄마가 같이 배낭여행을 가자고 하시는 거에요. 그래서 네팔 트레킹, 포가라 같은 곳일 줄 알았는데 죽기 전에 꼭 한 번은 가고 싶은 길이라는 카피를 어디선가 보셨대요. 우리 집안이 카톨릭이어서 더 끌리신 것도 같고요. 엄마의 통역사이자 여행 가이드로 가게 된 거라서 저는 사실 별 기대감이 없었어요. 내 여행이란 생각도 없었고요.


라울: 저는 대학교 복학을 앞두고 다녀왔어요. 취업 준비 때문에 부담을 느끼던 시기였죠. 주변 선배들한테 나중에 봐라, 휴가 일주일씩 내기도 어렵다고 들은 것도 있고, 마지막으로 길게 할 수 있는 여행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죠. 원래 국토대장정도 일곱 번 할 정도로 도보 여행을 좋아했고, 당시에 알바를 열심히 해서 돈을 좀 모아놨었거든요.

남들처럼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갈까 했었는데, 제 여행 성향을 잘 알고 있는 동네 형이 저한테 가장 사람 냄새 나는 여행을 할 수 있을 거다라며 추천해주더라고요. 캐리어보다 배낭을 좋아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만 있으면 1km 1유로 생각하고 가면 된다는 거에요. 많이 걷고, 오래 여행하고, 가격도 저렴하니 이거다 싶었어요.

 






_마음 속에 들어온 길




Q. 거의 800km가 되는 아주 긴 길인데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구간이 있다면요?


호시 : 보통 산티아고를 대표하는 끝없는 평야는 저에게 너무 지루했어요. 잠 오는 길. 눈 감고 걸어가도 그냥 갈 수 있을 정도니까.(웃음) 산길, 오솔길을 다니는 맛이 좀 있지 않아요? 저는 갈리시아 가는 길이랑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요. 해안가에 있는 높은 산이라 나무도 있고, 아침 안개가 자주 껴요. 영화<THE WAY>를 보면 주인공의 아들이 피레네에서 죽거든요. 아들의 유골을 들고 이 길을 걷는 장면이 나와요. 아들이 가고자 했던 길을 아버지가 대신 가는 그 영화 생각도 나더라고요.

 

라울 : 저는 반대예요. 한국에서는 지평선을 볼 수가 없잖아요. 땅이랑 하늘이 맞닿은 풍경을 보고 감동을 받았어요. 같이 걷던 독일인 친구는 자기 나라 시골가면 이 정도는 볼 수 있다고 했지만(웃음). 호시는 지루하다고 하셨는데 저는 일주일 걸으면 일주일 내내 감동을 받았어요. 원래는 잘 그러지 않는데, 카미노 걷는 도중에 낯선 집에 들어가서도 인사하고 그랬어요.

 





_문화가 가득한 길




Q. 자연 풍경 속을 걷는 것을 말고는 또 어떤 경험을 할 수 있나요?


라울 : 아스토리가라는 마을이 좋았어요. 대도시도 아니고 마을이라고 하기에는 좀 커서 여행하기에 딱 좋은 사이즈였다고 할까요. 가우디의 궁도 있고, 스페인의 초콜릿 생산지로도 유명해요. 레온도 기억에 남아요. 그 때가 한창 챔피언스 리그 할 때였는데, 무슨 도시를 가던지 사람들이 축구를 봐요. 저도 축구를 무척 좋아해서 밤에 펍 같은 데 가서 축구를 봤죠. 레알 마드리드 좋아한다고 하니까 아저씨들이 엄청 예뻐해주고(웃음).

 

호시 : 저는 가을에 갔기 때문에 지역마다 열리는 축제를 볼 수 있었어요. 와인과 맥주 생산지에서는 그 곳에만 있는 특산주를 마실 수도 있고요. 대부분 시골인데도 문화적으로 풍요로웠던 게 참 좋았어요. 마을 성당에 파이프 오르간이 있으면 밤에 공연을 하기도 해요. 레온 같은 경우는 상시로 오케스트라가 열리고요. 전 종교가 카톨릭이니까 성당 풍경을 보는 것도 재미있더라고요. 한국의 성모상은 단아한데, 여기서는 금발 치렁치렁하고, 왕관 큰 거 쓰고, 바비 인형 같은 화려한 분위기인 거에요.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서 사진도 많이 찍었어요.







 _따로 또 같이 연결된 사람들




Q. 길 위에서는 어떤 사람들을 만났어요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아예 일행이 돼서 같이 걷기도 하나요?

 

라울 : 혼자 온 저에게 앞으로 갈 길을 격려해주던 호스피탈레로(순례길 여행자들의 건강을 돌봐주는 봉사자들)아저씨에게도 감동을 받았었고요제가 개를 무서워하는데갑자기 엄청 큰 들개를 마주쳤을 때 어깨동무를 해줬던 이탈리아인 누나들도 기억나요같이 다니던 독일인 친구는 제가 바게트 빵을 통째로 그냥 뜯어 먹으니까 그건 반찬 없이 밥을 먹는 거랑 똑같다며 햄이랑 소스를 빵 사이에 넣어서 샌드위치로 먹는 법을 알려줬어요.

저는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이랑 지금도 정기적으로 만나요당시에 별로 친해지지 않았던 사람을 모임에서 다시 만나 친해지기도 하고요긴 길을 걸었던 사람들끼리의 끈끈함이 있는 것 같아요.

 

호시 엄마와 가니까 좋았던 점은 그 길에서 만나는 모든 할아버지할머니가 아빠이고 엄마였다는 거예요마을 어르신들이 대견해 하시면서 많이 챙겨주셨어요어디에 숙소가 있고 식당이 있는지도 미리 다 알려주셔서 큰 도움을 받았죠거기는 다 그런 분위기에요여행자를 배려해주는.

진짜 친한 사람이면 오늘 밤에 숙소에서 보자는 정도같이 가자는 얘기는 서로 안 하는 게 순례자 간의 암묵적인 룰 같은 분위기였어요아무래도 혼자 걷는 길이라는 게 있죠각자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기도 하고우연히 다시 마주치면 엄청 반가웠죠.



 



_카미노 블루와 카미노 기적




Q. 카미노 길의 끝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많다고 들었어요.

 

호시 : 작은 마을 성당에서 여행 10일 만에 미사를 봤어요. 마지막에 신부님이 순례길 여행자들을 제단 앞으로 불러 한 명 한 명 안아주시고 기도책자를 나눠주시는 거에요. ‘앞으로 가는 길에 축복이 있기를하는 느낌으로 나를 안아주시는데, 그 순간 눈물이 펑펑 났어요. 걷다가 무릎이 아파서 누워 계신 엄마 생각에 마음이 좀 그랬는지. 저는 특히 잘 안 우는 사람인데… 그 때 열 몇 명이 다 같이 울었어요. 나중에 다시 카미노를 혼자 갔던 이유도 그 성당에서의 경험이 마음에 깊이 남아서인 것 같아요.

 

라울 : 저는 산티아고 대 성당 미사에서 천장에 길게 매달린 향로를 흔드는 의식을 할 때 많이 울었어요. 원래는 옛 순례자들이 악취를 쫓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향로를 흔들어서 성당 안에 향이 퍼지게 했었대요. 고된 여정을 마치고 온 여행자들을 위로해주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Q. 카미노 여행 이후의 일상에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호시 : 거기서는 아침에 눈 뜨면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되잖아요. 정해진 할 일이 있으니까. ~무 생각도, 고민도 하지 않도록 머리 속을 리셋해 준 곳은 카미노 밖에 없었어요. 오롯이 나만을 생각할 수 있는 길이었죠. ‘카미노 블루카미노 기적이라는 게 있어요. 카미노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상사병처럼 그리워하는 게 카미노 블루, 카미노에서 결심했던 일이 이루어지는 게 카미노 기적이에요. 저에게는 둘 중 어느 쪽도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여행이에요.

 

라울 : 여행과 일상을 분리한, 지나치게 계획적인 여행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았는데, 카미노는 자연스러운 여행을 하기에 더할나위 없는 곳이었어요. 온전히 나를 위한 생각을 마음껏 하며 결을 수 있거요. 꼭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요. 아니, 갈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