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new year~”
깜빡 졸다가 기장의 인사에 잠이 깬다. 인도양 벵골만 어디쯤을 날아가던 에어인디아 비행기가 인도시간으로 새해를 맞은 것이다. 3시간 30분 전에는 이미 떠나온 출발지인 한국 시간으로 새해였고, 2시간 30분 전에는 경유지인 홍콩시간으로 새해, 그리고 마침내 아직 도착 전인 목적지의 시간 아래 내가 있다.
부스스 눈을 떠 주변에 앉은 사람들과 새해 인사를 나눈다. 내 옆의 앞자리와 뒷자리에 이런 사람이 앉아 있었구나를 새삼 느끼며 악수와 미소로 ‘해피 뉴이어’를 연발한다. 인천을 출발해 홍콩을 경유한 비행기는 계속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다. 덕분에 몇 시간 전에는 자리를 옮겨가며 하루에 마흔 네 번이나 석양을 본 적이 있는 어린왕자처럼 태어나서 가장 오랫동안 해가 지는 걸 봤다. 끝나지 않은 석양은 오늘 하루를 참 길게 늘여놓는다. 나른함, 아련함, 붉은 눈부심이 참으로 오랫동안 비행기 안을 가득 채웠다.
지금 나는 인도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 있다.
인도는 두번째이다.
첫번째 배낭여행으로 인도를 다녀온 후, 1년 만에 <인도미술> 책 한권을 가이드북 삼아 다시 한 번의 인도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누군가는 인도여행에서 어디에 가든 영혼이 깨인 초월한 것 같은 인도사람들을 만났다 했고, 그들이 자신의 편협함을 꾸짖으며 신의 가르침을 전수했노라 했다.
나는 첫번째 인도여행에서 아이스티를 시켰는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가져다주며 ‘괜찮아, 점점 식을거니까’ 라는 진리를 멋진 미소를 날리며 이야기해준 웨이터를 만났고,‘너 코가 낮은 게 참 매력적이구나. 나랑 결혼할래?’ 라며 국경을 초월한 프로포즈를 했던(내 생애 최초이기도 했다) 카펫가게 주인도 만났고, ‘내 이름은 쉬바 크리스챤 붓다 무네쉬야’라고 휘황찬란하게 자기소개를 하던 봇짐 하나 없이 14시간짜리 기찻길에 오른 친구를 만났었다. 그는 가감 없이 히즈라 언니들*이 내게 퍼부은 욕을 그대로 통역해주던 친절한 친구였다.
그리고 첫번째 배낭여행이자 인도여행이었던 그 여행은 나를 여행자의 몸과 마음으로 만들어준 수많은 만남을 던져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런 게 여행신(神)이 초짜 여행자에게 던진 질문과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싶은 것들을...
루트는 정하지 않았다.
<인도미술>을 읽으며 꼭 보고 싶은 유적지와 조각 다섯 군데만 다 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히 만족스러운 여행이 될 것이다. 나머지는 그 때 그 때 여정에 따라, 또 길 위에서 만나게 될 우연에 따라 결정하면 된다. 두 달이면 다섯 군데를 찾아가기에 매우 충분한 시간이고, 갑자기 2~3주 이상의 장기 계획이 생긴다 해도 좋을 시간이다. 짐은 최대한 단출하게 꾸렸다. 로컬 버스를 타고 걷고, 걷고, 또 걷게 될 여행이니 아무래도 짐은 가벼운 게 좋을 거다.
첫번째 인도여행을 할 때, 매일 밤 숙소에서 짐을 부리고 버릴 것들을 추려내는 게 중요한 일과였다. 침대 위에 배낭 속 짐들을 모두 꺼내 주르륵 펼쳐놓고, 반드시 챙길 것과 버려도 상관없는 것과 버리는 게 좋을 것들로 짐을 분류하곤 했다. 이미 방문한 지역에 대한 가이드북 몇 장도 찢어서 버릴 만큼 가벼움을 추구했던 나의 배낭은 그러나 전혀 그 무게나 부피가 줄어들지 않았다.
매일매일 새로운 욕망이 어제의 빈자리를 채워나갔던 것이다. 여행의 짐은 여행자의 미련과 비례하고, 여행의 즐거움과 반비례하는 것 같았던 그 때, 내가 만난 가장 쿨한 여행자는 작은 크로스백 하나를 메고 세 달째 인도를 여행 중이던, 나뭇가지 칫솔의 친환경성과 편리함을 열변하던 청년이었다.
숙소는 그날 그날 찾을 계획이다. 주머니가 가벼운 나같은 배낭여행자를 위한 숙소는, 방 한 칸은, 혹은 침대 한 개는 예약 없이 어디서든 구할 수 있다는 걸 지난 여행을 통해 배웠다. 아마 이곳들은 예약시스템도 없을 거다. 사실상 필요가 없으니까. 배낭을 메고 조금이라도 숙박비를 깎기 위해 서너 군데 게스트하우스를 헤매며 흥정할 내가 눈에 선하다. 그렇게 고른 숙소에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숨을 돌릴 때야 비로소 내가 300원을 깎기 위해 이 고생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나의 모습도 자동으로 그려진다. 매번 그 사실을 잊고 고생을 사서 할지라도 뭐 어떤가, 내가 고른 그 숙소가 그 동네에서 가장 맛있는 짜이를 가장 멋진 전경을 볼 수 있는 루프탑에서 마실 수 있는 숙소라는 건 변함이 없을걸?
그런 곳에서 작년처럼 운명적으로 유타카같은 여행 친구를 만나게 될지 또 누가 알겠는가. 14시간의 기차이동, 6시간의 지프차 이동으로 도착한 다즐링에서 꼬질꼬질한 차림새에 오기를 더해 찾고 찾아 체크인했던 Long island 게스트하우스는 여행 전에 봤던 시트콤에서 페트병에 뜨거운 물을 부어 난로를 대신한 에피소드를 보지 못했더라면 완전 서러웠을 냉방의 기억을 남긴 숙소였다. 하지만 이곳에서 작년 인도여행의 2주를 함께 여행한 유쾌한 친구, 유타카를 만나기도 했다. 유카타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일본의 전통 복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 헷갈리는 이름의 친구, 유타카는 여자친구인 위스키와 함께 여행중이었다. 한 방울이라도 바닥에 흘릴라치면 슬픈 표정으로 ‘Good bye, my love’라고 인사를 꼬박꼬박 하던 이 친구와 파업중이어서 마비된 도시를 걸어서 뚫고, 걸어서 국경을 건너 네팔에 도착했다. 다시 20시간이 걸리는 버스를 타고 도착한 카트만두에서 함께 나눠 마신 소주는 진한 동료애 그 자체였다.
“Ladies and gentlemen, now we’re approaching…”
뭄바이 공항에 거의 도착했음을 알리는 방송이 나온다. 벗어둔 신발을 신고, 앞좌석 주머니에 쑤셔 넣은 볼펜과 일기장, 기내식 먹을 때 따로 빼둔 물티슈와 1회용 포크까지 챙기는 걸 잊지 않는다. 일기장에 끼워둔 사진 한 장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작년, 뭄바이 센트럴역 화장실에서 만난 사진 찍기 좋아했던 아가들이 활짝 웃고 있다. 아가들의 엄마는 입장료 4루피를 받고 화장지를 건네주는 안내원이자 미화원이었다. 필름을 현상하던 중에 이 아가들의 사진을 찍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또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에 이번 여행에 챙겨오게 된 사진이다. 이 사진 한 장을 들고 내가 그 아이들을 알아볼 수 있을까, 결국 건네줄 수 있을까? 아이들은 기뻐할까? 이제 곧 있으면 알게 될 거다.
긴장과 설렘을 안고 착륙을 기다린다.
안녕? 인도, 다시 만나게 되서 반가워.
*히즈라 : 남아시아에서 생물학적 남성이 여성의 성정체성을 갖고 여성의 복장과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 혹은 집단. 인도에서 히즈라는 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초대되어 혹은 초대받지 않아도 축복이나 애도의 노래를 부르며 사례금을 받는다. 사례금을 받지 못하거나 적게 받으면 성적인 욕을 퍼붓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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