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여름이다.
즉, 본격적으로 ‘여행’이 입에 오르내리는 시기가 온 것이다.
흔히들 여행을 '일상의 탈출'이라 말한다.
그치만 여행을 '일상의 탈출'로 생각하고 싶진 않다.
그보단 차라리 매 순간 여행자의 태도로 살면 어떨까.
여행지에서 기꺼이 할 수 있는 것들을 삶 속에선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 나 대신 여행을 하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뭐라도 해주길 꿈꾼다.
여행지에서 나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드는 것을 상상도 못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들어주길 원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선 길을 잃으면 낙담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세상 만물을, 차창 밖을 지나가는 여인의 뒷모습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곧 다시 만나요, 손을 흔들고 헤어질 때 슬픔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내가 예의에 어긋나 보이지 않았나를 생각한다.
여행지에선 내가 누구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삶 속에선 제발 나 좀 알아봐달라고 부질없는 말을 할 때가 있다.
여행지에서 나는 그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찾아낼 줄 안다.
그런데 삶 속에선 내 고장에서 가장 좋은 것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본다.
여행지에서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나는 행여라도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낯선 사람에게 포기하지 않고 친절을 베푼다.
여행지에서 나는 거리의 악사들과 가장 자유로운 이들과 가장 슬퍼보이는 이들과
이제 막 도시에 도착한 여행객들과 같은 소망을 갖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친절함을 기대하는 손길을 뿌리치고 타인과 소망을 나누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오래전 누군가 걸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앉았던 식당에서 누군가 다른 사람이 커피를 마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의 존재와 남의 존재가 연결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연결이 아니라 나와 남의 분리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목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 알고 더 느끼는 데서 단순한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확실한 길만 찾아가지는 않는다. 불확실함이 많은 데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확실한 것만 찾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가장 용기 있는 자들과 가장 말이 잘 통하는 자들과
가장 정이 많은 자들과 가장 고통 받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가장 득이 되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여행지에서 나는 외로울 때 해나 달이나 한 점 불빛과도 친구가 되 수 있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외로울까봐 자주 타협을 한다.
여행지에서 나는 쉼 없이 많은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곧잘 지루한 답변만 늘어놓는다.
여행지에서 나는 얼마나 자주 설레고 얼마나 자주 탄성을 지르던가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기쁨에도 슬픔에도 고통에도 얼마나 자주 무감각하던가
여행지에서 나는 해의 뜨고 짐 같은 가장 단순한 풍경에서도 위대한 지구의 운동 법칙을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느라 어떤 법칙에도 진리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인상과 풍경.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엄지영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2007
그러니 이제 여행에서 삶을 배우고 싶다.
여행자의 태도로 살아보고 싶다.
여행이 곧 일상이 되는 순간, 일상이 곧 여행이 되는 순간,
삶이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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