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채식전문매거진 비건 2014년 9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혼자 또는 둘이 함께 떠나는
느릿느릿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오르비에토 - 폼페이 - 포지타노 - 피렌체
느긋하기로 유명한 나라, 이탈리아. 한국을 수년째 강타하고 있는 ‘힐링’ 열풍도 사실 1980년대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슬로라이프’ 운동이 선배격이다. 스타벅스조차 감히 범접하지 못한 자신들만의 전통적 요리법과 제철 먹거리, 예술적인 수공예 등 고도의 장인 정신으로 똘똘 뭉친 소도시들. 그렇다면 우리의 여행도 그에 맞게 속도와 몸집을 줄여야 하지 않을까. 공정여행사 직원 라임과 재롬이 말하는 소수 인원으로 소도시 여행하기. 그 게으른 달콤함.
재롬(이하 J) : 공정여행사 트래블러스맵 해외여행팀 투어 가이드
누구와 함께 가야 할까
L : 저는 절친과 둘이서 처음 이탈리아 땅을 밟았어요. 제가 바티칸의 예술작품에 감동했다면 친구는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강아지와 다양한 사람들에게 열광했죠. 같은 장소를 친구의 다른 시선으로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이탈리아는 역사, 예술,
명품, 음식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갖춰져 있어서 누구와도 함께 갈 수 있는 여행지가 아닐까.
J : 저는 유럽 여행할 때 혼자 갔었는데 1인 여행을 하기에 이탈리아는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적어도 외롭지 않은 곳 같아요.
풍부한 볼거리들을 보다 보면 혼자라는 것도 금새 잊어버리잖아요. 단지 나보다 더 박식한 가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죠. 전혀 사전지식이 없다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조차 그저 아름다운 돌덩이로만 보일 테니까요. 만약 누군가와
함께 간다면 역사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와 함께 가고 싶고 그다음은 친언니에요. 감성도 비슷하고 서로의 라이프 스타일을
잘 아니까.
릴랙스를 위한 여행 루트
L : 사람들은 보통 로마와 바티칸이 임팩트가 있으니까 제일 마지막에 봐야 한다고 하던데 저는 그 반대로 봤어요.
오히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어느 정도 지식이 쌓인 후 다른 곳을 가니까 풍경을 흡수하는 깊이가 달라지는 걸 느꼈어요.
J : 저도 로마부터 가는 것을 추천해요. 처음에는 긴장도 되고 의욕도 앞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거대한 문화유산들을
열심히 둘러보고 적응한 다음, 남부 소도시에 가서 진짜 이탈리아의 자연풍경과 느긋함을 맛보는 거죠.
오르비에토 : 중년 부부, 슬로시티에서 성곽 길따라 걷기
L : 이탈리아와 한국 사람들의 성향은 닮은 점이 많아요. 다혈질이면서 정도 많죠. 그런데 한국이 현재 패스트 라이프라면
이탈리아는 슬로 라이프를 고수한다는 점에서 삶의 방식은 매우 다른 것 같아요.
J : 느림 지향적 전통이 가장 짙은 도시가 오르비에토에요. 오후 1시부터 4시까지는 상점 셔터를 내려버리죠. 시에서 아예
정책적으로 ‘슬로 전략’을 수립해 온 곳이니까요. 주택 뒷마당 텃밭에 키우는 브로콜리 같은 채소들도 쉽게 볼 수 있고
시내 식당들이 오르비에토에서 생산한 현지 식자재만 사용하거든요. 그리고 도시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성곽 길을
2~3시간 정도 걷는 코스가 있는데 마치 중세시대 한가운데에 있는 느낌이랄까. 바티칸에서 교황이 된 기분이라면, 이곳은
마을 사람이 된 것 같은. 로마나 피렌체 사이에 있어서 교통도 좋고 특히 부모님께 추천해드리고 싶은 도시죠.
도란도란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거든요.
폼페이 : 혼자서 맞이하는 경이로운 황량함
L : 폼페이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는 사람들이 의외로 주변에 많았어요. 번성한 로마제국의 화려한 유산들을 보다가 화산폭발로
한 순간에 멸망한 역사의 현장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을 때. 그 상실감과 허무함!
J : 맞아요. 저는 서글펐어요. 인류가 만들어낸 웅장한 계획도시가 자연의 힘으로 잿더미가 돼버렸다는 것이. 황량함이 느껴졌죠.
사람이 달려가다 멈춰버린 모습, 강아지가 앉아있는 것까지 다 남아있거든요. 모든 삶이 그 자리에 멈춰버린 거죠.
지금까지 아등바등하며 움켜지고 살았던 내 알량한 자존심과 열등감이 우습기도 하고.
L : 혼자서 조용히 생각도 하고 가슴에 쌓아온 고민과 삶의 짐들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아요.
J : 누군가 혼자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편지를 쓰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L : 올해 개봉한 영화 <폼페이 - 최후의 날>을 보고 간다면 과거를 상상하는 데 몰입이 될 것 같아요
포지타노 : 연인과 함께 레몬 향기 가득한 로맨틱 비치 데이트
L : 헐리우드 발 로맨스 영화에서 이탈리아는 종종 여성들이 일상을 탈출하고 새로운 만남을 꿈꾸는 장소가 되곤 해요.
특히 영화 <투스카니의 태양>에 담긴 이탈리아는 정말 로맨틱했어요.
J : 로마에서 포지타노를 향해 해변 도로를 달리는 모습이 압권이었죠. 포지타노 마을은 신혼여행지로도 유명하고 브래드 피트 등
셀럽들이 앞다투어 으리으리한 별장을 지을 만큼 매력적인 곳이에요. 구불구불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남부의 온화한
기후 속에서 자란 레몬이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있고, 큰 관광지에서는 못 봤던 어린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죠.
돌계단의 마지막에 한 발짝을 떼고 고개를 드는 순간, 지중해 바다가 영화처럼 펼쳐져요. 사랑하는 사람과 손을 잡고 두 사람만의
달콤한 미래에 대해 속삭이기에는 안성맞춤이죠.
피렌체 : 자매끼리 골목골목 핸드메이드 공방 찾기
L : 대기업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한국과 달리 이탈리아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분야의 장인과 소상공인들의 권익보호를 위한
협동조합이 발달한 나라에요. 두오모 성당으로만 알려진 피렌체가 사실은 가죽장인을 포함한 각종 기술자나 공예가들의 작은
가게들을 쉽게 찾을 수 있는 ‘길드’의 도시죠.
J : 피렌체 도시 중심부에 어느 한 벽면을 보면 길드의 흔적을 찾을 수 있어요. ‘양모조합’이면 양 머리 모양이, ‘대장장이조합’이면
집게모양이 새겨져 있는 거에요. 가죽시장은 안타깝게도 벌써 중국산 제품들이 많이 들어와 있긴 하지만. 지금도 피렌체
어딘가에서 젊은이들이 가업을 물려받아 장인 정신을 이어 가고있죠.
L : 저는 그래서 여행 책을 잠시 덮고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나요. 우연히 베키오 다리를 지나 들린 가게 할아버지가
몇 대째 전통방식으로 종이를 만들고, 그 종이로 노트와 카드를 만들어 판매하고 계셨어요. 직접 작업과정도 보여주시고
캘리그래피도 써주셔서 어찌나 감사했던지.
J : 피렌체는 참 여성스러운 도시 같기도 해요. 언니와 친구와 팔짱 끼고 돌아다니면서 아기자기한 가게들을 돌아볼 수 있는.
L : 일본으로 치면 지유가오카, 한국이라면 삼청동?
공정한 이탈리아 여행을 위한 TIP
L : 마지막으로 이탈리아를 더욱 아름답게 여행하기 위한 재롬만의 팁을 주세요.
J : 면세점도 좋지만 현지의 작은 상점에서 기념품을 구매하셨으면 좋겠어요. 이동할 때는 최대한 도보로, 도시 간 이동은
저가항공보다는 기차로 이동하면 환경도 지키고 다양한 이탈리아의 풍경을 볼 수 있답니다.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의 문화를
이해하려는 마음의 여유를 가져주시고 소소한 생활규칙들을 지켜주셨으면 좋겠어요. 화장실에서 노크하지 않기, 가판대 과일을
만지지 않기 등등. 로마에 갔으니 로마의 법을 따라야겠죠.
파스타보다 피자보다 이탈리아 샐러드
L : 이탈리아인에게 음식이란 곧 삶이에요. 세계 최고의 미식 요리로 통하는 프랑스 요리도 알고 보면 그 뿌리에는 이탈리아가
있을 정도로 풍부한 재료와 다양한 요리법들이 존재하죠.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이탈리아에서는 나폴리 피자와 스파게티만을
떠올리는 것 같아요.
J : 저는 이탈리아 여행할 때 오히려 샐러드를 먹는 법에 눈을 떴어요. 실제로 이탈리아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은 참 건강해요.
‘EATLY’라는 마켓레스토랑이 있는데 식자재 판매와 요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독특한 곳이죠. 가장 눈에 띄는 것들은
역시 올리브, 토마토, 자몽같은 천연 유기농 재료들이에요. 특별한 양념이나 조리법 없이 먹어도 맛과 향이 가득 찬 느낌!
L : 그러고 보니 이탈리아 유학 중인 친구가 소개해준 삔찌모니오(Pinzimonio)가 생각나요. 한국에서 당근이나 오이를 쌈장에
찍어 먹듯이 이탈리아에서 신선한 채소를 올리브 오일에 찍어 먹는 생활요리에요. 특정한 레시피는 없지만 보통 유리컵에
올리브 오일을 담고 채소를 길쭉길쭉하게 썰어서 꽂아 먹어요. 간단한 요리이고 대충 썰어서 먹을 수도 있겠지만 재료의
색감과 형태를 고려해서 자신만의 요리를 창조하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감각이 놀라워요. 이런 사소한 부분까지 ‘아름다움’을
중요시하는 문화가 부럽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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