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에서 맞는 아침.
유난히 공기가 상쾌한 것 같다.
오늘은 KBS송신소에서부터 성인봉을 지나 나리분지까지 트레킹을 하기로 한 날.
전날밤 묵은 숙소에서 트레킹 도중 먹기 위한 점심도시락을 싸주신다.
공정여행자답게 일회용기 사용 대신, 집에서부터 챙겨와 함께 배타고 울릉도로 온 도시락통에
맛있어보이는 주먹밥을 담는다.
트레킹 내내 함께 하시며 우리들에게 울릉도의 생태와 문화에 대해 설명해주실 분은 김종두 선생님이다.
공직생활을 울릉도에서 마무리하시고 산이 좋아, 식물이 좋아 울릉도 주민이 되신 분이다.
울릉산악회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고, 서울에 울릉도 식물들을 옮겨 심어 연구하는 작업도 하고 계신다.
산을 좋아하는 분 다운 '포용'이 얼굴에서 행동에서 은근히 드러난다.
함께 여행했던 분들 중에는 김종두 선생님이 마치 '산신' 같다며 좋아하시는 분이 계실 정도로.. ^-^
KBS송신소에서 성인봉으로 오르는 길은
오르막, 평지, 계단길이 적절히 섞여 있어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은 산길이다.
다른 지역에 있는, 어디서나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산의 최고봉과는 달리
성인봉은 가까이 다다라야만 그 모습을 볼 수 있고 다른 높은 봉우리들과 어우러져 있다하여 이름이 성인봉이란다.
여기서 잠깐, 산을 오르기 전에 울릉도의 기본정보와 자연에 대해 알아보면.
트레킹 내내 김종두 선생님은 각종 산나물과 식물, 나무들에 대해 설명해 주신다.
조금씩 뜯어 향도 맡고 맛도 보는 즐거움도 산길을 걷는 큰 묘미이다. ^-^
앞서 걸으셨던 일행이 식물을 조금 뜯어 뒤에 따라오는 일행에게 건넨다.
어제 만났을 뿐인데, 울릉도의 하룻밤과 우리를 둘러싼 나무들이 어느새 일행 사이의 마음의 거리를 좁혀놓았다.
울릉도의 식물에는 ‘섬’ 혹은 ‘울릉’ 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들이 많다.
울릉더덕, 섬말나리, 섬동백, 섬백리향, 울릉국화, 섬피나무, 섬벗나무, 섬바디, 울릉고사리 등..
섬피나무
이름에만 육지식물에 '섬'이나 '울릉'이라는 단어가 붙은 것이 아니라
같은 더덕이나 나리, 동백, 국화여도 울릉도의 것들은 지역에 적응한 특색이 드러난다.
잎이 조금 더 도톰하고 둥글둥글 하다거나, 천적이 없으니 육지의 식물에는 있는 가시가 퇴화되었다거나 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번 울릉도 여행에서 기대되었던 가을단풍은 성인봉을 향해 오르면 오를수록
곳곳에 울긋불긋한 단풍이 눈에 들어온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빽빽한 나무들 사이사이를 물든 단풍들.
저 빽빽한 나무들 전체가 단풍 물이 들면 장관이겠다 상상해본다.
트레킹 중간중간 김종두 선생님은 일행의 속도를 봐가며 적당한 곳에서 넘치지 않는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다.
산에서는 너무 많이 쉬는 것도 곤란하다. 다리가 풀려버리면 더 나아갈 힘을 내지 못하기 때문.
일어선 상태로 잠시 숨을 고르면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시 앉았다가 다시 출발하는 식으로
좀 더 울릉도를 즐겁게 즐기기 위해 에너지를 나눠쓴다.
고사리 계곡
점차 고도가 높아질수록 '원시림'이라는 말과 어울리는 적당한 습도가 느껴진다.
깊은 숲, 습도, 빽빽한 나무들 그 사이에 야생고사리가 지천에 널려있다.
고사리의 계곡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끝없이 펼쳐진 고사리, 고사리.
깊은 산중에만 자란다는 관중(고사리의 한 종류)도 실컷 볼 수 있다.
수천, 수만년을 살아온 고사리가 울릉도 숲 속에 있으니 그것 또한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시간이 만들어낸 원시림에 고사리만큼 잘 어울리는 것도 없는 듯 하다.
나리분지
세시간여 빠르지 않은 속도로 오르다보니 드디어 986m 성인봉에 도착.
울릉도의 봉우리들이 만들어놓은 스카이라인을 빙 둘러본다.
정말 성인봉만큼 높은 봉우리들이 많다. 그리고, 울릉도의 또 다른 상징, 나리분지를 가만히 내려다 본다.
나리분지를 처음 봤을때의 감정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어딜 봐도 빽빽하고 울창한 숲.
시간이 만들어낸 숲.
사람 손이 닿지 않은 숲.
많은 이야기를 숨겨 놓고 있을 것만 같은 숲...
아무리 쳐다봐도 지치지가 않는다. 성인봉에서 나리분지를 내려다보는 감동을 계속 느끼고 싶어 계속 이곳에 머무르고 싶다는 생각과 어서 내려가 나리분지에 서서 봉우리에 둘러싸인 포근함을 느끼고 싶은 생각이 동시에 든다.
봉우리 이름들과 위치, 멀리 내려다보이는 나리분지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난 후 아쉬움을 안고 나리분지로 내려간다.
성인봉에서 나리분지로 내려가는 길은 나무데크로 만들어진 계단길이 많다.
숲 속의 청량함을 마음껏 느끼며 한계단 한계단 천천히 내려온다.
오가는 길에 만나는 등산객들과 나누는 정겨운 인사도 산행의 즐거움이다.
숲길 해설을 해주신 김종두 선생님은 산에서 만나는 모든 울릉도민들과 친분이 있어 보인다.
선생님 덕에 울릉도 식물이나 울릉도 문화에 대해 배우면서 걷는 것도 즐거웠지만 오며가며 만나는 선생님의 지인분들에게 막걸리를 얻어마시는 즐거움도 덩달아 있었다.
도시락통에 싸온 주먹밥과 라면으로 진수성찬을 이룬 점심식사시간에는
김종두 선생님이 직접 담그신 향긋한 술까지!
울릉도의 원시림, 그 숲속에서 한 잔 씩 나눠 마셨던 술의 진한 향은 울릉도 숲을 떠올릴 때마다
함께 기억될 것이다...
두런두런 이야기꽃 피우며 나리분지로 내려오자 알봉, 형제봉, 송곳봉, 나리봉 등이 둘러싸고 있는 평지가 펼쳐진다.
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인 나리분지는 화산폭발로 형성된 칼데라호가 침몰해서 만들어진 지형이다.
역시나 그 안이 숲과 갈대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천연기념물인 울릉국화의 자생군락지도 있다.
나리분지에서 밟고 있는 땅이 왠지 폭신폭신한 느낌이 든다.
갈대밭의 너머에 틈새가 보이지 않은 숲이 있다. 사람의 길이 보이지 않는 그 숲속에 평화롭게 살고 있을 동물들을 그려본다.
나리분지는 자연경관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울릉도 전통 가옥인 투막집과 굴피너와집이 남아있어 울릉도의 자연환경에 사람들이 어떻게 적응해왔는지 그 지혜를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겨울에 한 번 눈이 내리면 처마끝까지 눈이 쌓인다는 울릉도에서 옛사람들은 집 내부 구조를 回자 형태로 만들어 눈에 갇히더라도 일상생활이 가능한 구조로 집을 지었다. 외벽과 지붕으로 이루어진 집의 내부에 방과 부엌, 외양간을 빙 두르는 복도식의 마당이 있는 셈이다.
실제로 안에 들어가서 복도를 따라 집 안을 한바퀴 돌아본다.
안방도 있고, 가운데 부엌도 있고, 외양간이 가로로 긴 집의 내부에 일자로 늘어서 있다.
처마까지 눈이 쌓여 밖으로 나갈 수 없을 때 이 안에서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나는 겨울을 보냈을 생각을 해본다.
아이들은 복도를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라도 했을까?
갈대와 나무를 사이로 난 길을 걸어 오늘 묵을 민박집 <산마을식당>으로 향한다.
나리분지 안 조그만 마을의 민박집에서 울릉도의 두번째 밤을 맞이할 것이다.
민박집에 도착하자 온갖 산나물로 만든 반찬들과 전통주인 씨껍데기술, 파전이 트레킹을 마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연히도 우리가 묵은 민박겸 식당의 따님이 얼마 전 트래블러스맵의 지리산 둘레길 공정여행에 참가한 분이어서 덕택에 서비스로 산채전과 씨껍데기술을 감사히 받아 먹는다.
저녁식사후 김종두 선생님과 함께 산책 나간 캠핑장에는 저동에서 왔다는 가족들이 텐트치고 맛난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그네타는 아이들 옆에서 우리 일행은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전통그네를 탄다.
힘들다, 어렵다며 낑낑 대지만 금새 내려오지 않는다. 마치 옆에 자라고 있는 나무의 잎사귀라도 딸 양 마냥..
캠핑장을 지나 울릉도 식수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는 용출소까지 산책.
가로등이 없는 어두운 길이지만 서로의 음성에 기대어
울릉도의 밤. 좋은 사람들. 나리분지가 주는 포근함.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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